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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獨立을 넘어 平和로
안중근, 獨立을 넘어 平和로
- 안중근의 생애
안중근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다. 성리학의 시조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명문가의 후예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렸을 때 응칠(應七)이라 불렀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배웠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하게 되어 서구적 세계관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유학은 기본이고 불교에도 식견이 있었다고 한다.
안중근은 원래 즐겨하던 네 가지가 있었다. 친구와 의를 맺는 일,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 총으로 사냥하는 일, 날쌘 말을 타고 달리는 일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명포수였다고 한다. 멋과 여유를 지닌 그의 내면세계가 태평성대를 노래하려 했지만 난세를 타고난 무인(武人)의 피는 어렸을 적부터 뜨겁게 끓어올랐던 것 같다.
안중근은 31년이라는 짧은 삶을 오롯이 한 마음으로 뜨겁고도 치밀하게 살았다. 그의 목표는 대한 독립과 동양평화, 나아가 세계 평화였다. 그는 독립투사일 뿐 아니라 교육계몽 운동가이자 밝은 눈을 가진 평화운동가이다. 무지한 민중을 일깨우기 위해 교육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자기 재산을 털어 의병활동보다 먼저 삼흥三興학교와 돈의敦義학교를 세웠고 대학설립 계획도 세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교육계몽운동의 한계를 절감하고, 1907년 군대해산 이후 해외독립운동에 투신(投身)한다. 1909년 2월 안중근이 중심이 되어 피끓는 청춘 12명이 국가를 위하여 몸을 바칠 것을 맹세 하며 약지를 자르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하였다. 지금에 와서 약지가 잘려진 손바닥 도장은 정신문화의 도도한 트랜드(trend)가 되고 있다.
한학과 유학을 통한 동양문화를 바탕으로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동서양의 사상을 두루 섭렵한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독립(獨立)과 평화(平和)는 안중근에게 ‘하나’의 화두였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브라우닝식 7연발 권총으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의거(義擧) 직후 검거되어 그날 밤 11시에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졌다. 그 후 1910년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일제 치하 중국의 여순 감옥에서 고양된 정신으로 숱한 일본인들을 감동시키며 붓글씨를 쓰고 집필을 하였다.
안중근은 ‘천명(天命)’을 다하기 위해서는 교육자도 되고 기업인도 되고 의병도 되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장군이라기에는 사상적으로 너무 깊고 크다. 그는 100년을 내다본 대사상가요, 대정략가라 할 만하다. 세계적 안광(眼光)을 가진 세계평화의 대표자다. 동양평화론의 논술체계와 사상적 깊이는 그 시대 놀라운 것이었다. 대의명분을 바탕으로 한 의리와 지조는 직관적 사고로 그 신뢰를 더욱 두텁게 한다. 올곧은 양심과 처연한 행동으로 보여준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감화는 그가 대인(大人)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제 우리가 알고 있던 ‘의사(義士)’ 안중근은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 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유해는 만주 어디엔가 묻혀서 흩어져 가고 있지만, 위대한 영혼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때를 맞이하여 온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다.
안중근 순국 100주기를 맞아 한국의 대표적 소설가 이문열은 그의 불꽃 같은 생애를 다룬 소설 [불멸] 1권을 내놓았다.
- 영혼에 새긴 유묵
안중근의 유묵(遺墨)은 모두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 이후부터 순국 전까지 40여일 간(경술년(庚戌年) 2월과 3월) 옥중에서 초인적인 정신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는 순국할 때까지 중국의 여순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고 한국 사람은 동생 정근, 공근, 사촌동생 명근, 변호사 안병찬 이외는 한 사람도 한국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다. 이들은 아무도 그에게 유묵을 받은 일도 없고 받을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를 재판하는 책임자인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을 비롯하여 판사, 검사, 서기, 변호사에게 써 주고, 통감부에서 파견되었던 사카이 경시와 헌병과 소노키 통역, 쿠리하라 감옥전옥과 간수장들, 감옥배치 의무관과 교회담당 승려 등이 그의 유묵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유묵은 일본인 형무 관리를 통해서만 입수할 수 있었다. 안중근은 글을 잘 쓰는 서예가는 아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왜 그의 유묵을 모으려 했으며 그것을 보배처럼 보관하고 있었을까?그의 유묵은 해방이 되고나서도 40여 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밝혀지고 하나씩 모여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의 근간이 될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안응칠安應七 역사], [면담록] 그리고 대부분의 유품들이 1980년대를 전후해서 발간되고 모아지고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의거 100년(2009년 10월 26일) 순국 100년(2010년 3월 26일)을 맞이하는 때에 이르러 비로소 ‘예술의 전당’에서 종합 전시회가 열리게 되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 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 글은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공판정을 오갈 때마다 경호를 담당했던 간수 일본군 헌병 지바 도시치에게 써준 것으로 전한다.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의 처형 후 자진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가서 안중근의 사진과 이 유묵을 고이 봉안했고, 1934년에 49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안중근 의사의 명복(冥福)을 빌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사망 후 부인과 조카딸 미우라 쿠니코가 이어 보관하고 있다가 1980년 8월 23일 동경국제한국연구원을 통해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되었다. 일본 현지의 대림사에는 이 유묵 글씨를 조각한 현창비가 만들어져 있으며 해마다 안중근을 모시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人無遠慮 必有近憂 인무원려 필유근우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가까운 곳에 근심이 생긴다.
이 작품을 이어받은 사람은 코베시 미카게쵸 무라카미 히로미씨로 2대에 걸쳐 보존하여 왔다. 무리카미의 부친 고 카미무라 쥬덴은 메이지-다이쇼 시대에 걸쳐 대장성 세무관료였다. 러일전쟁 직후 대련에 부임한 카미무라는 관료의 몸이었지만 자유주의 사상에 빠졌던 사람이고, 우연한 일로 안중근과 알게 되어 그의 인격을 존중하게 되어 친분을 쌓아갔던 것이다. 처형 3일 전 카미무라씨가 옥중의 안중근을 방문하여 ‘이 세상과 하직하기 전에’라는 필적을 의뢰하여 삼엄한 경관의 눈을 피해 어렵게 손에 넣은 귀중한 자료라 전해지는데, 안중근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글귀인 이 書를 카미무라씨는 우정의 기념으로 소중하게 보존하여 일본까지 가지고 돌아갔다. 군국주의가 심하던 당시에 일본 관료들에게 알려져 큰일이 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없애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지는 않았지만, 오랜 마음고생 끝에 보관하여 온 것으로 카미무라씨가 죽은 후에도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2대에 걸쳐 보존해 왔다고 한다.
獨立
홀로서기
一日 不讀書 口中生 荊棘 일일 불독서 구중생 형극
하루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서 가시가 돋는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안위 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마음을 쓰며 애를 태운다.
안중근의 유묵(遺墨)은 현재 국내외에서 50여 점이 확인되고 있다. 이 글은 모두 일인(日人)들에게 전해졌다. 그 내용을 보면 동서사상을 실천으로 풀어낸 현실고발과 감계(鑑戒)라는 점에서 안중근 글씨는 곧 안중근 그 자체다. 글 속에는 국가관, 세계관, 인생관, 종교관 등이 드러나 있다.
이 글들 외에 안중근에 관한 유품은 따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하니 일본인들의 손에서 다시 돌아오거나 보관되고 있는 이 유묵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겠다.
사형선고를 내린 일본 법관은 평생토록 괴로워하며 가족에게 그를 존경하라고 했다. 이러한 안중근의 유묵은 단편적으로 독립투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알려져 왔으나 그 진정한 실체는 지난 100년 동안 고요히 잠자고 있었다. 이 시기에 와서 빛을 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안중근의 유묵은 단순한 서예작품이 아니라 사형선고를 받은 후 상고도 포기한 절정의 시간에 쓴 위대한 혼의 장엄한 흔적이다. 그의 글씨에서 어김없이 낙관으로 나타나는 약지가 잘린 손바닥 도장은 일본인으로 하여금 가슴 서늘해지는 결의의 신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동양평화는 이토히로부미도 주창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안중근의 동양평화가 삼국 독립과 권리균등을 전재로 공동군대 창설과 공동화폐 사용방안을 제시한 반면 이토는 일본의 무자비한 한국의 국권유린과 중국침탈 한 가운데서 말로만 평화를 부르짖고 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 중국은 일본을 사멸시켜야 평화 이전에 우선적으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절대절명의 시대였다.
안중근의 31년 짧은 생애(1879~1910)를 통하여 「동양평화론」의 사상이 잉태하고 성장한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17세 때 온 집안 식구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고 서양인 신부, 홍 신부, 요셉 등과 가깝게 지낸다. 또 불어도 조금 배우게 된다. 천주교 입교로 서구적 세계관을 흡수하게 된다. 더구나 두 신부는 독불 사이의 알사스 로렌 지역의 출신이었고 따라서 청일 사이의 한국의 국제적 고민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 같다. 또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사상적 영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또 안중근은 천주교인이면서도 유교적 일면과 불교적 일면을 가진 통교적 성격을 엿보이고 있다. 한말의 애국계몽운동, 동학운동, 그리고 기독교운동의 진행과정 속에 인권의식 혹은 민권의식이 성장하면서 민개념이 점차 근대시민 개념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민중 혹은 인민이라고 하는 초기적 시민이 중심이 되어 시민적 민족주의론의 틀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새로 형성되는 민중 혹은 시민을 보면서 일본에서 성장하고 있는 시민층을 보았던 것이고 중국에서 새로 형성되고 있는 시민을 보았던 것이고 이들 삼국의 시민층의 연대와 협력을 꿈꾸면서 그의 동양평화론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광범한 연대의 삼국연대론 혹은 동양주의론은 애국계몽운동의 국제적 인식의 틀의 하나로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기의 복택유길(福澤諭吉), 준정등길(樽井藤吉) 등의 아세아주의론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김옥균의 「삼화론三和論」에서부터 일본 측의 아세아주의론의 비판적 수용과정에서 확립된 이기(李沂), 장지연(張志淵) 등의 「삼정론三鼎論」 혹은 「삼국제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서양자본주의의 침략과정을 황백전쟁(黃白戰爭)으로 규정하고 적침에 대비한 황인종의 단결을 주장하는 논리는 일본의 한국침략에 대한 경계심을 심하게 약화시켰던 것이 사실이다. 신채호는 동양주의를 독일에 망한 폴란드가 서양주의를 논함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강력한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이러한 동양주의론의 복잡한 논쟁을 배경으로 안중근의 독자적인 「동양평화론」이 나온 것이다.
안중근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일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성금을 내어 국채를 보상하는 경험에서 나중 동양평화론에서 각국의 대표를 모아 회의를 구성하고 그 경비는 일반이 성금을 내어 운영한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가 국채보상운동을 할 때 회원이 몇이나 되느냐고 야유하는 일본인 순사에게 “회원은 2천만 명이요, 재정은 1천 3백만 원을 거둔 다음에 보상하려 한다.”고 큰소리 친 것의 연장선상에서 그 뒤 동양평화회의를 구상하면서 “(동양평화회의의) 재정확보를 위하여 회비를 모금하면 2억 명의 인민이 가담할 것이다. 각국, 각 지역에 동양평화회의의 지부를 두도록 한다.”고 갈파한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安重根)의 동양평화론은 삼국제휴론 혹은 삼정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신채호(申采浩) 류(流)의 비판을 수용하는 사상적 공간에서 실천적으로 전개되었다. 의병전투의 과정에서 실천적으로 고민하고 체득한 몸의 사상이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의 동양평화론과 이름은 같지만 그 구조와 성격은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대립적(對立的)이다.
일본의 동양평화론은 탈아론(脫亞論)의 입장에 서서 아세아의 일원이 아니라 서양제국주의의 일원이 되어 서양제국주의가 아세아에 침략해 들어오는 것처럼 일본도 아세아에 침략해 들어오며 침략에 대한 경계심을 없애기 위하여 아세아주의를 표방하고 나온 논리(論理)이다. 침략의 사상적 도구로서 동양평화론이다.
그에 대하여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일본을 탈아론(脫亞論)의 세계로부터 입아론(入亞論)의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이웃나라의 독립을 무시하고 국권을 짓밟는 침략주의 혹은 팽창주의를 동양평화의 틀로써 묶고 억누르면서 협력과 평화체제를 만들려는 사상체계이다.
그는 “한 나라라도 자주독립하지 않으면 동양평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제6회 심문조서)이라고 하고 “모두가 자주독립할 수 있는 것이 평화이다.”(제6회 심문조서)고 말한다. 민족독립이 전제가 되어 그것을 촉진하고 보장하는 동양평화이며 동시에 동양평화가 전제되어 그것을 촉진하고 보장하는 민족독립이다. 여기에서 민족주의와 동양평화론의 일체화의 길이 열린다.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 이후 서양침략주의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는 황백전쟁론(黃白戰爭論)의 흔적도 보이지만 기본적인 문제는 서양인 그 자체가 아니라 그들의 횡포성이며 그 횡포성은 러시아가 심하고 재한(在韓) 일본인(日本人)이 더욱 심하다고 하여 인종주의를 탈피하고 있다. 그는 서양 침략주의와 서양의 천주교도를 비롯한 일반 시민을 구별하여 동양 3국 5억 인구가 단결하여 서양 침략주의를 물리쳐야 하지만 일본의 침략주의를 서양의 시민들에게도 알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 침략주의를 물리쳐야 할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여기에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서양 그 자체가 아니라 서양의 침략주의를 막으려는 열린 지역주의이며 세계평화론(世界平和論)과 일체화 될 수 있는 논리(論理)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밖으로는 서양 침략주의에 공동 대응하고 안으로 역내 국가 일본의 침략주의를 억제하는 양날의 칼을 가진 틀로써 동양평화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틀은 민족독립과 동양지역 협력과 세계평화가 불완전하게나마 통합(統合)되는 문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이토히로부미를 제거한 것은 한국독립을 위해서 라고도 하고 동양평화를 위해서 라고도 하고 세계평화를 위해서 라고도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시민세력과 군주의 관계 인식
그는 민권개념으로 계몽된 새로운 인민을, 국권을 지키는 국권 담당세력으로 세우는 입장이다. 이것은 애국계몽운동 우선이냐 국권회복운동 우선이냐의 노선투쟁(路線鬪爭) 상황에서 통합의 차원에 서 있었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으로 개발된 인민을 국권회복운동(國權回復運動)의 담당세력으로 세우는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인민, 민중은 상공인, 직업인, 지식인, 학생, 노동자 등의 초기적 시민세력을 의미한다.
중국, 일본, 한국 삼국(三國)에서 형성되고 있던 시민층(市民層)의 연대와 협력을 꿈꾸면서 그 연대의 틀로써 동양평화론이 모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민세력에 대한 신뢰와 기대로 황제에 대한 존중은 일정하게 남아 있으나 지배세력에 대한 비판(批判)과 저항(抵抗)은 매우 강하다.
독립해서 스스로 지킬 수 없는 것은 “한국이 군주국(君主國)이라는 점에 원인이 있다.”고 하여 기존의 군주국의 한계에 대한 인식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일본에 대해서도 일본의 새로운 시민세력과 천황(天皇) 권력의 공존 내지 제휴를 전제로 이토히로부미(伊藤搏文)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세력이 위로 천황을 속이고 아래로 시민층을 파멸로 몰아가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를 위협하고 있으니 “역천(逆天)한 자이므로 하늘의 뜻에 순응(順應)하여 그를 치는 것이 천명(天命)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의 천황과 초기적 시민층 사이의 현존 지배권력과 한국의 황제와 초기적 시민층 사이의 현존 지배권력 간의 상호 타협과 제휴에 대응하여 그리고 중국의 잠재적 유사구조도 염두에 두고 양국 혹은 3국 인민의 연대(聯隊) 가능성의 지평(地坪)을 보았던 것이다.
새로운 정책 제안
그는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고 그 정책의 하나로 “여순(旅順)을 개방한 다음 일본, 청국, 그리고 한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해 평화회의를 조직한 뒤 이를 공표하는 것이다. 여순은 일단 청국(중국)에 돌려주고 그것을 평화의 근거지로 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여순(旅順)을 왜 동양 삼국의 공동관리 하로 하고 여기에 동양평화회의 본부를 두자는 것인가? 당시 여순은 동북아의 최대의 분쟁지였다. 중국의 동북3성(東北三省)의 출입구인 천혜(天惠)의 항구로써 일본의 대륙침략의 교두보(橋頭堡)이며 러시아가 가장 탐내는 부동항(不凍港)이었다. 한국으로서는 고구려 옛 땅으로 지금도 고구려 성지가 남아 있는 곳이다.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다가 러일전쟁으로 일본에 뺏긴 항구이기도 하다. 이 분쟁의 항구를 ‘평화의 근거지로 삼자’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럽 분쟁의 종(種)이었던 철과 석탄의 보고 루르지방, 자르지방이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철강석탄동맹으로 공동 관리 하에 됨에 따라 유럽통합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안중근은 서유럽보다 반세기를 앞선 동양최대의 분쟁지를 이해관계자의 공동관리 하에 두어 동양평화를 만드는 거점으로 역전시키는 모델을 제시했던 것이다.
동양평화회의의 재정확보에 대하여 “여순에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여 회원을 모집하고 회원 한 명 당 회비로 1원씩 모금하는 것이다. 일본, 청국, 그리고 한국의 인민 수억이 이에 가입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청취서聽取書」
여기에서 동양평화회의(東洋平和會議)를 구성하는 각국 다자(多者) 대표는 각국 정부에 대하여 상위의 기관이라는 성격을 갖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곳에 동양평화회의 지부를 두어 국가권력을 경유하지 않고 각지에서 작동할 수 있게 된다. 동양평화회의가 정착되면 점차 동남아 국가들의 가입을 받아 확대할 수 있으리라고 했다.
그리고 원만한 금융을 위하여 공동의 은행을 설립하고 각국이 함께 쓰는 공용화폐를 발행하도록 하며 그리고 지역에 은행의 지부를 설치할 것을 서술하고 있다. 은행설립도 어느 한 나라가 주도권을 갖고 각국에 걸쳐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다자(多者)가 함께 공동은행을 세우도록 하자는 것이며 화폐 또한 공용으로 쓰는 제3의 화폐를 발행하자는 것이다.
또한 3국의 청년들로 하여금 공동의 군단을 만들고 그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語學)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을 높일 것을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의 지도하에 한․청 두 나라는 상공업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일본의 경제적 선진성과 이니셔티브(initiative 發案制)를 인정하는 공동경제발전의 논리이다.
끝으로 한․중․일 세 나라의 황제가 로마교황을 방문하여 협력을 맹세하고 왕관을 받을 것을 권유한다. 그래야 세계민중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통역사 역할을 했던 소노키 스에요시(園木末喜)씨의 기록에는 동양평화회의가 동쪽 끝에 있는 점을 감안하여 로마 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게 하여 서양 개별국가의 승인 없이도 국제적 승인 효과를 거두려 했다고 적고 있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서술 가운데 소노키 스에요시씨의 기록이 그가 안중근과 가장 친밀하게 접촉한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고 또 내용으로 보아 보다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양평화의 원점으로 돌아가자
안중근이 일본의 제국주의의 길이 한국과 아세아를 파괴하고 러시아로 미국으로 전선이 확대되고 마침내 일본 자신도 파괴되고 말 것이라고 본 예견은 적중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 군비확충, 징집, 징용, 등으로 시민사회의 파괴를 가져오리라는 전망도 적중하였다. 이토히로부미의 죄상 15개 항목은 지금 전문가가 분석해 보아도 거의가 놀랄 만큼 예리한 것이었다. 이토히로부미와 같은 온건파를 죽였기 때문에 강경파의 득세를 저지하지 못하여 한국 식민지화가 촉진되었다는 비판의 논리는 오히려 허구(虛構)임이 증명되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사태를 꿰뚫고 정확하게 대응하였고 위대한 인간승리의 상을 보여주었고 역사적 역할을 다 하였다.
동양평화의 길, 한․중․일의 민중이 혹은 시민이 서로 연대하여 시민대표로 동양평화회의를 조직하고 그것이 각국의 상위조직이 되어 기능적으로 공동안보체계, 공동개발체계, 복수 언어 교육체계, 공동개발은행, 공동화폐제의 실시를 제시한 것은 너무나 탁견(卓見)이었다.
우리는 그를 유럽공동체의 아버지 장 모네[Jean Monnet 1888. 11. 9~1979. 3. 16 프랑스의 경제학자]와 같이 동아세아 공동체의 장 모네라 했지만 장 모네보다 시대를 앞선 선구자(先驅者)다.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안중근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그는 여명기(黎明期)의 아세아 시민연대의 대표요, 아세아 평화의 칸트(Immanuel Kant 1724. 4. 22~1804. 2. 12. 독일의 철학자)이다.
지금 우리는 동아세아 공동체를 추구하고 동북아 공동안보체계를 구상하고 공동군축(共同軍縮)을 꿈꾸며 공동경제발전체제를 논의하고 동북아 개발은행 설립을 주장하고 동아세아 화폐통합을 논의하고 동아세아 시민사회를 꿈꾼다. 우리는 이것을 동북아판 ‘마샬플랜(Marshall Plan)’이 아니라 동북아판 ‘안중근 플랜’이라 불러왔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백 몇 십 여년 후 유엔의 형성으로 연결되었듯이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100년 후 동아세아 평화번영공동체의 형성으로 연결되게 하자는 것이다. 일본이 100년 만에 시민혁명형 정권교체가 일어나고 탈아론(脫亞論)에서 입아론(入亞論)으로 기류가 바뀌면서 하토야마 신(新) 수상이 동아세아 공동체 구상의 일환으로 공동화폐론을 들고 나오고 있지 않은가.
안중근은 감옥에서 비장한 마음으로 100년 후 일본에서 ‘안중근의 날’을 말할 것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참으로 우리는 아세아의 신(新) 시민과 함께 손잡고 안중근의 날을 상상하고 다시 100년 만에 동양평화의 원점(原點) 안중근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21세기의 현 상황(狀況)에 맞는 새로운 동아세아 평화구상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진화(進化)의 진통이 있을 때 100년 전 그의 장엄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의 구상을 되돌아보자.
※ 참고자료
- 「안중근」예술의전당 2009. 10. 26. 펴냄
- 「불멸1」이문열 민음사 2010. 2. 1. 펴냄
- 네이버 백과사전
- 인터넷 각종 기사
2010년 4월 4일
정리 최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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