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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 앞 느티나무와 이순신
수루 앞 느티나무와 이순신
통영은 문학정신과 예술이 깃든 아름다운 도시다. 그 배경에는 막강했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있었으니. 통영(統營)이란 이름도 여기서 왔다. 두룡포(頭龍浦)라는 조그마한 포구가 군사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조선 수군을 통할하는 권한과 역할만큼 물류와 경제 규모가 증가하니 인구집중으로 문화가 번창하고. 삼도수군통제사는 남쪽 해변의 제왕이었다고 한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왜의 침략에 대비하면서 생겨난 막강한 제도와 조직의 상징적 표현일 것이다. 전국을 통일한 일본은 대륙을 넘볼 정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왜란 이후 중국 중심의 동북아 질서도 흐트러졌다. 조선은 전 국토가 유린당할 만큼 폐허가 되었다. 그런데도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운 까닭은 해상 진출에 소극적이었던 조선왕조의 놀란 가슴을 대변하고 있다.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의 출발점에는 한산대첩(1952)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통영의 높은 언덕, 서피랑 오르는 옹벽에 적힌 생명 사랑의 글귀가 눈길을 끈다. “자연이 인간의 근원이라면, 생명의 하나인 인간도 자연입니다. 그러니 자연과 자연이 합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고 섭리입니다.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어요.” 그 옛날 망루 서포루에 올라 통영 앞바다를 내려다본다. 물비늘이 반짝이며 황금빛 온기를 길어 올리고 있다. 북녘으로 내려다보이는 세병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세병관은 정유재란 6년 뒤인 1604년에 지은 통제영의 객사 건물이다. 한눈에 보아도 으리으리하고 호방하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는 이곳에 없다. 비좁은 요새 한산섬에서 잠 못 이루며 전쟁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세병관(洗兵館), ‘하늘의 은하수를 가져다 피 묻은 병장기를 닦아낸다’ 참혹했던 전쟁에 대한 경계와 평화를 염원하는 경구이리라. 하지만 그 이름이 이상적 관념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한산도 들어가는 배,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한산대첩의 바다 위에 쏟아지는 하얀 포말을 바라본다. 꽁무니를 따라오는 괭이갈매기의 비행이 여행자의 가슴을 두드린다. 3층 갑판에 오르니 바람결이 시원하다. 20여 분 뒤 한산섬에 닿았다. 제승당 들어가는 길은 바다와 숲이 어우러져 포근하다. 상록의 남방계 식물들로 곱게 단장된 길에는 주말의 인파로 붐빈다.
한산도는 게의 집게다리 모양이 여러 번 겹쳐있어 수군 기지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한다. 제승당(制勝堂)은 집게다리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 끝 요새다. 한산대첩은 우리 힘으로 우리 땅을 지킬 수 있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처음으로 안겨준 전투다. 조선 수군 연합군은 견내량에 있는 왜적을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크게 무찔렀다. 왜군은 서해 진출의 발이 묶여 육군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부터 파죽지세로 치닫던 기세가 꺾이게 된다. 조선은 곡창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지켜냄으로써 군량미를 조달할 수 있었다. 한산대첩의 승리로 왜군은 이순신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는 동안 정유재란을 일으키니.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완전히 무너졌다. 조선 수군의 배는 열두 척만 남았다. 견내량에서의 승기가 패기로 바뀌며 전라도를 비롯한 남해를 내어주는 순간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열두 척의 배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세계 해전사에 기적으로 남았다.
한산대첩 이후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통합 관리하기 위해 한산섬에 삼도수군통제영를 두게 되었다. 전쟁 중인 조선 수군의 임시 본영이 남쪽의 작은 섬에 있었던 거다. 첫 통제사는 이순신 장군으로 운주당(지금의 제승당)에서 조선 수군의 군사업무를 총괄했다. 사실 그 배경에는 이순신과 원균의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내부 충돌을 막고 다급한 전쟁 중의 위계질서를 바로 세운 것이다.
제승당은 반도처럼 불쑥 나온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7월부터 한양 압송 전인 1597년 2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이곳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근무했다. 난중일기 대부분과 시를 쓴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에는 ‘지혜로 계책을 수립한다’는 뜻으로 운주당이라 불렀다. 운주당은 이순신 장군의 집무실 겸 숙소였다. 장군이 압송되고 칠천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면서 운주당도 왜의 손길에 스러져갔다. 1739년 영조 때 다시 건물을 세우면서 ‘승리를 만드는 집’이란 뜻으로 제승당이라 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감시하며 고뇌하던 망루인 수루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 휘영청 밝은 달밤 잠 못 이루는 장군의 마음이 저 파도 속에 있었을까? 발길 아래 늙은 참나무 한 그루 앙상하게 여윈 고개를 내민다. 저 가지 끝에 장군의 배 열두 척이 걸려 있구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충무사에 들러 이순신 장군의 영정 앞에 고개 숙여 예를 올린다. 한없이 인자하지만 매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신다. 장군은 32세에 과거시험 무과에 합격했다. 지금으로 치면 꽤 늦은 나이다. 47세에 전라좌수사가 되었다. 류성룡의 천거는 시류를 꿰뚫어 전쟁에 대비한 과감한 인재 등용책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1년 2개월 동안 전쟁 준비를 하면서 거북선을 만들었다. 판옥선에 지붕을 얹어 선봉에서 돌격하며 왜적의 조총 사격을 무력화하는 창의적인 군함을 만든 것이다.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직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사천해전에 처음 출전하였고 한산대첩 등에서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과 원균을 흔히 역사의 라이벌이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격하게 크로스를 이루는 반대 상황에 서 있었다. 원균은 당당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엘리트 코스를 밟았고, 이순신은 몰락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하며 말단직을 떠돌았다. 이순신이 파격적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언제나 류성룡이 있었다. 원균은 하늘에서 땅으로 꺼지는 결과를 낳았고 이순신은 땅에서 하늘로 오르는 결과를 낳았다. 한계를 초월한 영웅의 시련은 드라마가 아니었고 그 바탕에는 백성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 있었다.
한산섬에는 온통 소나무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제승당 주변에는 다양한 활엽수들로 가득하다. 조경용으로 심은 나무들도 있지만 자생하는 나무들이 더 많아 보인다. 제승당의 지형과 식생이 독특해서 눈길을 끈다. 제승당 수루 앞마당을 지키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를 바라본다. 소나무나 느티나무 모두 신령스러운 나무로 정신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나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그 가치는 두 나무가 좀 다른 것 같다. 소나무가 문인의 기질을 닮은 나무라면 느티나무는 무인의 기질을 닮았다. 소나무가 변치 않는 기상과 꼿꼿한 기질을 대변하는 나무라면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고 호방한 장군의 기개를 닮은 나무다. 수루 앞 느티나무를 보며 드는 생각, “이순신 장군은 느티나무를 닮았구나!” 마을 주민들이 두 발 뻗고 편히 쉬어가는 정자나무, 천년을 사는 느티나무 말이다.
한산섬 능선을 따라 숲길을 걷다가 귀여운 동박새를 만났다. 남방계 식물 말오줌때 가지를 정신없이 날아다니며 식사를 하고 있다. 두 눈 가득 하얀 뿔테 안경을 좇아 한참 동안 반가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붉은 열매를 먹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잎과 줄기에 붙은 작은 곤충을 잡아먹는 것 같다. 덕분에 숲을 살찌우는 생명의 소리를 듣는다. 숲길 가에는 덜꿩나무 열매가 붉은 볼을 화사하게 밝히고 있다. 스스로 내어준 탐스러운 열매의 과육은 생물 다양성을 키운 공진화의 산물이다. 그 바탕에서 인류가 진화해 왔으니 우리는 사랑의 화신이 아닌가! 이순신 장군의 사랑과 헌신도 공진화라는 우주의 법칙 안에 있으리라.
최재길 / 식물문화연구가
참고문헌
징비록, 류성룡 저, 오세진 신재훈 박희정 역해, 홍익출판사, 2015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 장한식, 산수야, 2018
임진왜란 동아시아 삼국전쟁, 정두희 이경순, 2021
임진왜란, 김영진,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21
*이 글은 (사)숲과문화연구회에서 발행하는 [숲과 문화] 2023년 11.12월(32권 6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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