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지리산 자료실 공간입니다.
덕천서원
산천재에서 도로를 따라 2km를 더 올라가면 덕천서원이 나타난다. 길옆에 서 있는 홍살문과 학자수(學者樹)가 이곳이 서원임을 알린다. 홍살문은 금문(禁門)으로 경건한 영역을 상징하고, 학자수는 붓을 상징한다. 홍살문 맞은편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몸과 마음의 티끌을 씻어버리라는 세심인 것이다.
여기까지는 여느 서원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덕천서원 정문에 걸려 있는 시정문(時靜門)이라는 현판 중 정(靜)자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정자가 저렇게 걸린 이유는 아직까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풍수로써 조명하면 이렇게 풀린다.
산천재의 풍수형국은 출렁거리는 용트림으로 회전운동 하는 회룡고조형이다. 회전하면서 용트림치는 기세는 동(動)에 해당된다. 남명은 천왕봉처럼 어떤 외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은 기개를 지녔다. 그 같은 행동은 정(靜)에 속한다. 남명의 뇌룡정 시절은 정중동(靜中動)인 반면 이곳 산천재 시절은 동중정(動中靜)에 비유될 수 있다. 그르므로 정(靜)자를 크게 강조한 시정문을 들어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남명의 동중정 세계로 들어서는 것도 된다.
덕천서원은 남명사후 4년이 지난 1576년에 창건되었다. 서원을 창건했던 것은 제자들이다. 그러나 이곳은 남명이 초가집 한 채를 짓고서 제자들과 즐겨 찾았던 터였다.
그 터에 세워진 덕천서원이기에 이곳을 잡은 남명의 풍수형국이 궁금했다. 서원 앞쪽으로는 물줄기가 흐르고 이를 건너가면 1km가량 떨어진 야산을 만난다. 야산 과수원 부근에서 덕천서원 쪽을 보면 확 트인 지리산 광경들을 볼 수 있다. 듬직하게 서 있는 천왕봉에서부터 덕천서원에까지 이르는 산줄기의 연결은 1:100,000 지도책으로 찾아보아도 식별된다.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뻗어간 산줄기는 중봉으로 건너간다. 중봉에서는 시천면과 삼장면의 경계선을 따라 계속 내려오다가 구곡산을 만난다. 이때 지도상에 나와 있는 덕천서원지점과 구곡산 정상을 일직선으로 그어본다. 그어 본 일직선이 덕천서원으로 들어오는 지맥선이다. 더 정확히 알아보려면 1:25,000 등고선지도를 놓고 마루 금을 그어보면 되나, 앞서 그은 일직선만으로도 지맥선 파악에는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도에 그어놓은 일직선과 현장을 맞춰 보는 일이다. 덕천서원 바로 뒤편에는 지맥선과 연결된 나지막한 동산 하나가 보인다. 연화봉(蓮花峯)이다. 이정도만 분석되면, 덕천서원 형국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량 소수서원과 바로 붙은 동산은 영구봉(靈龜峯)이다. 영구봉은 비로봉에서 흘러내려온 산줄기와 잇대고 있다. 이곳 덕천서원의 연화봉과 천왕봉도 소수서원의 영구봉과 비로봉처럼 똑같은 법칙에 걸려있다.
소수서원은 영구하산형이기에 이곳도 연화하산형이라고 얼핏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명칭은 어쩐지 이상하다. 왜냐하면 발 달린 동물은 하산 할 수 있으나 뿌리를 박고 있는 식물이 하산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화낙지(蓮花落地)로 고쳐본다. 이제는 땅에 떨어진 연꽃이 되어 그래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이때 병산서원 형국을 참작하면 된다. 연꽃이 씨방의 무게를 못이겨 고개를 숙인다는 연화도수형(蓮花到水形), 전통풍수형국 목록을 살피면 연화낙지는 없어도 연화도수는 있다. 덕천서원 풍수형국은 연화도수형인 것이다.
덕천서원 약력을 들춰보면, 창건 때는 덕산서원(德山書院)이라 하였으나 후일 덕천(德川)으로 고쳤다 한다. 연꽃과 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내 천(川)자로 개명되었음이 짐작된다. 또 덕천서원 앞마당에는 원래 연못 두 개가 있었다는 기록도 나와 있다. 덕천서원의 연화도수형은 그 같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강당공간과 경의
시정문을 들어서면, 트인 마당과 소박한 강당을 만나게 된다. 이곳 지리산문하 서원들은 그들만의 특징을 갖고 있다. 퇴계문하 서원들이 건물을 중요시 했다면, 남명문하 서원들은 터를 중요시 했다. 그리고 전자가 내부 공간 활용을 중요시했다면, 후자는 외부공간에 기상을 담으려 했다.
천왕봉 기상이 뻗어내리는 덕천서원은 강당 중심 서원이다. 남명이 제자들에게 천왕봉 기상을 담아서 가르쳤던 것은 경의(敬義)였다. 그래서 이곳 강당도 경의당(敬義堂)이다.
남명의 경을 미주알고주알 전문용어로 따지고 들어가면, 뭐가 뭔지 잔뜩 어려워져버린다. 그런 것은 학자들의 관념론 영역에 속한다. 아주 쉽게 일반적 상식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경은 이런 것이다.
먼저 경은 공경할 경(敬)자다. 그렇다면 무엇을 공경하여야 한다는 것일까. 이때 공경하여야 할 대상은 자신의 정신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을 깨치면 독 견성에 이른다. 견성하기 위해서 모든 생각을 오로지 화두에다 집중시킨다. 이런 것이 불교승려들의 최고요체인 참선공부 방법이다.
유교선비들의 경이란 한마디로 정신집중을 뜻한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실수도 하고 때로는 실언과 시정잡배 행동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에도 정신집중이 곧게 되어 있으면 선비정신은 초지일관 살아있게 된다. 그래서 남명은 무엇보다 경 공부를 중요시 했다.
경 공부에 박학다식한 학자라 할지라도 나약한 선비가 되어 침묵하는 지식인이 된다면, 학문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경 공부 뒤에 따라 붙은 것이 의(義)였다. 의는 행동을 가리킨다. 의는 의로운 의(義)자다. 그러므로 경의(敬義)라는 것은 “행동하는 참된 지식인”을 뜻한다.
“알면 행동하라”라는 교육을 놓고, 퇴계 문하는 이를 지행일치(知行一致)로 가르쳤다. 남명은 이보다 더 강력하게 가르쳤다. 지행합일(知行合一致)하라고 말이다. 퇴계의 자모교육 방식과, 남명의 엄부교육 특성에서 오는 차이이기도 했다.
퇴계와 남명이 운명한 지 20여년 후,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러자 지(知)와 행(行)의 일치(一致)점을 찾기 위해 이 생각 저 생각에 몰두했던 퇴계문하생들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시쳇말로 임진왜란 초기에 모두들 36계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지행합일을 교육 받은 남명문하생들은 왜란발발 소식을 듣자 그 즉시, 칼을 들고 의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웠다.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대장 정인홍, 의병장 조종도 등등이 모두 남명문하생들이었다. 이때 의병(義兵)은 이곳 경의당(敬義堂)에 걸린 의(義)자를 붙인 것이다. 만약 퇴계문하에서 먼저 구국결사 민병대를 조직했더라면 의병이 아닌 향병(鄕兵)이라는 명칭을 붙였을 것이다.
행동을 중요시 하는 지식인일수록 형식과 격식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남명문하서원의 건물들도 이를 닮고 있다. 그저 건물이란 비바람만 막으면 된다는 식이다.
덕천서원 기단석을 보아도,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을 보아도, 제대로 다듬어 놓은 것이 없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강당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활주까지 이곳 강당을 받치고 있다. 집장사가 덕천서원의 궁색한 강당을 보고나면, 돈 안 되는 집이라고 말할 것이다. 목수가 보면, 건축적 가치마저 없는 것이 덕천서원이라고 폄하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시각은 껍데기 문화재답사 시각에 불과하다. 현재의 낙산사는 소실되었다. 소실된 것은 해방이후 집장사식으로 지어버린 대부분의 건물들이다. 그러나 낙산사 터는 1,600여 년전 의상대사가 택지했던 그터 그대로다. 이곳 덕천서원은 터와 공간을 읽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강당공간과 미학
덕천서원은 있을 것만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강당과 함께 동재와 서재가 보인다. 그것이 강당공간에 있는 건물 전부다. 강당 뒤편을 보아도 사당 하나만이 덜렁 있을 뿐이다. 세워놓은 건물보다 빈 공간이 더 많은 덕천서원에서 볼거리에 고민하던 사람을 보았다.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찬 퇴계문하서원들보다, 텅 빈 덕천서원이 훨씬 더 빼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은 개인적인 체험 때문이다.
학창시절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00정 앞으로 2km라는 커다란 푯말을 보고 끝까지 올라갔다. 신흥사 푯말보다 컸기에 대찰보다 더 큰 정자인줄 알았다. 막상 도착하니 수박밭 원두막보다 작은 초라한 정자였다. 그러나 별 볼일 없는 정자에서 본 설악산은 정말 장관이었다. “이곳 정자보다 설악산 절경을 한 눈에 담고 있는 전망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고 소리치고 싶을 정도였다.
동양화의 산수정경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여백의 미, 결코 빈 말만은 아니다. 이글을 집필하고 있을 때, 부산대학교 예술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2005년 9월달부터 필자에게 교양학부와 대학원 석박사과정인 학생들을 상대로 풍수강의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학부 강의 제목은 “풍수미학”이고 대학원 강의는 “한국인의 미의식”이라는 강의였다. 충분히 가능한 연결관계다. 한국인의 눈썰미는 산과의 눈맞춤이었고, 이를 연결했던 잣대는 풍수였기 때문이다. 그 같은 잣대눈금들을 하나씩 강의해주면 된다. 그러한 풍수눈금에는 우리문화재 칫수도 들어있고, 이곳 공간도 들어있다. 덕천서원 강당 뒤편에 있는 문을 열고 앞쪽을 쳐다보면, 사진과 같은 광경이 보인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공간의 미학이다. 승려시절 자주 이용했던 산사(山寺) 객승들의 방, 가로질러놓은 대나무에 수건 하나만 덜렁 걸려있는 작은방은 빈 공간 그 자체였다. 빈 공간일수록 자연을 더 담는다. 자연이라는 공간에 시간이 담기면 그것은 계절이다.
덕천서원은 계절을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겨울에 보는 학자수는 이곳 두류산 답사 때 쓴 남명의 시구와도 어울린다.
“… 가수촌 세 둥지에는 추운 까치가 산다…
가수삼소한작거(嘉樹三巢寒鵲居)…”
학자수를 가을철에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분명히 은행나무인데 모양은 매화나무줄기처럼 각인된다. 사군자화에 그려진 매화나무도 이곳 학자수처럼 생겼다. 매화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한다. 학자수 옆에는 정절문인 홍살문도 서 있다. 이것들은 뒤편에 있는 덕천서원과도 어울린다. 경의라는 정신공부와 학자수의 지조 그리고 홍살문에 걸린 절개는 모두 선비정신이며 덕목이다.
사람이 집 속에 들어가서 살긴 살지만, 결코 집에 사람이 잡히면 안 된다. 그런 까닭에 선조들은 좋은 집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집을 잡고 살며, 집은 자연을 가득 담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것이 우리 전통 건축물에 담긴 선조들의 시각이기도 했다.
덕천서원 서재는 자연을 담는 것이 집이라는 풍경을 보여준다. 서재 뒤편은 지리산의 산줄기가 받쳐준다. 건물과 산이 어우러지는 광경이란 저런 것이다. 서재를 허허벌판에다가 저렇게 세웠다면, 그것은 초라한 집 한 채 일뿐이다.
이곳 동재가 그런 허허벌판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동재 뒤편으로는 받쳐주는 이렇다 할 산들이 없다. 그래서 선조들은 동재와 마주하는 서재에다가 어느 서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공간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서재의 방과 방 사이에 마룻바닥을 깔아 놓고서 그곳을 빈 공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터놓은 서재 빈 공간으로 동재를 바라보면, 사진과 같은 광경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간을 보고서 감상한다는 것은 주관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만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 수 있다. 덕천서원 강당공간에 담긴 시정문과 서재 공간에 담긴 동재 광경이 똑같다고 말이다. 우리 문화재 속에는 선조들의 공간시각이 들어 있다. 그런 것 중에 하나가 덕천서원이다.
사당 공간
강당 뒤쪽에 있는 사당 문을 두고서, 직선 축을 따지는 현대건축물처럼 볼 때는 이해되지 않는다.
강당 좌측 벽과 처마를 받치는 활주사이로 사당 문이 보인다. 더 자세히 보면, 사당건물도 한쪽으로 쏠려있긴 마찬가지다. 덕천서원 강당과 사당은 직선 축 위에 배치된 것이 아니라 엇비슷하게 놓인 곡선배치를 하고 있다.
자연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산줄기와 물줄기를 보더라도 모두 곡선을 이루고 있다. 곡선 모양인 자연을 담으려면 이를 담는 그릇도 곡선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건축물들은 한결같이 곡선 배치를 하고 있다.
곡선배치를 보여주고 있는 이곳 강당과 사당은 또다시 특이한 곡선 하나를 보여준다. 강당과 사당의 방향이 10도 정도 틀어져있다는 것이다. 강당은 동남향하고 있다. 그런데 사당은 남쪽으로 10도를 더 틀어놓은 동남남향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아차린다.
덕천서원 강당과 사당처럼 벌어진 한옥공간을 두고 이런 경우도 있었다. 공영방송TV에서 우리 전통민가를 소개할 때, 저렇게 틀어진 공간배치는 고기압과 저기압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폭이 좁은 곳에 떨어진 빗물을 폭이 넓은 쪽으로 빠지게 하려는 배출구 용도에서 그랬다고 소개했다. 그런 것들이 우리 선조들의 지혜라면서 감탄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날 틀어진 공간을 살펴보면, 빗물은 중간에서 양편으로 갈라져 내려간다. 그러므로 배출구 용도로써 틀어놓은 것은 절대 아니다.
사당과 강당을 연결하는 중간선은 어느 서원에서도 그렇듯이 잉과 육(혈)을 연결하는 지맥선이다. 선조들이 풍수로써 배치해 놓은 문화재를 서구 과학적 지식 시각으로 해석을 하니 블랙코메디 설명이 되었다. 이곳 10도의 뒤틀림을 알기위해서는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 사당문을 들어서면 숭덕사(崇德寺)라는 현판과 함께 작지만 대추씨처럼 튼실한 사당이 보인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사당들도 덕(德)자가 들어간 상덕사, 존덕사다. 반면 정여창을 배향한 남계서원과 김굉필의 도동서원은 그냥 사당(祠堂)으로 칭한다. 동방5현에 속한 김굉필과 정여창일지라도 생존 시, 이렇다 할 제자들을 육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큰 덕(德)자는 육성시켜놓은 문하생들이 있을 때 붙일 수 있는 글자라고 생각되어진다. 스승의 높고 큰 덕을 기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것은 유교예제에 속한다.
숭덕사 좌측 벽면을 보면 용이 그려져 있다. 우측 벽면에는 백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누가 보아도 이는 풍수에서 말하는 좌청룡 우백호를 그려놓은 것이다. 서원배치에 있어서 좌청룡과 우백호가 그대로 반영된 건물을 지적하자면, 동재와 서재가 이에 해당된다. 흔히 혈(穴:무덤봉분)자리에서 앞쪽을 바라볼 때, 좌측에 있는 산을 좌청룡이라 하고 우측에 있는 산을 우백호라고 하듯이 말이다.
덕천서원의 혈자리는 강당이기에 강당 좌측에 있는 동재와 우측에 있는 서재가 각각 좌청룡 우백호에 해당된다.
덕천서원 강당은 동남향을 하고 있다. 이럴 경우 동재는 방위 입지 상 동북재가 되고 서재는 서남재가 되어야 정확한 표현이 된다. 그러나 어느 서원이든 그 같은 방향들은 무시하고서 동재와 서재로 칭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좌청룡은 동쪽을 상징하고 우백호는 서쪽을 상징한다. 좌청룡 우백호라는 풍수상징은 동서남북이라는 방위들보다 우선시 되었다. 우선시 되었던 풍수시각으로 조명하면 덕천서원의 강당과 사당이 10도가량 어긋나게 배치된 이유까지도 알게 된다.
이제부터는 보다 넓은 시야로써 살펴보는 문화재답사 덕천서원 이야기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덕천서원과 산천재
우백호가 그려진 사당 벽화 쪽 담장 너머로는 제법 넓은 공터가 있다. 저런 공터는 도산서당 뒷담 너머에서도 보았다. 도산서당의 경우는 서당으로 들어오는 풍수재백을 보호하기 위한 공터다. 그러나 덕천서원 공터는 그와 다르다.
연화봉의 지맥은 숭덕사로 들어와서 잉을 만들고, 경의당에는 혈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풍수지맥과는 무관한 공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원은 풍수시각과 유교시각이 들어있는 문화재다. 이곳 공터는 풍수와 무관하기에 이제부터는 유교시각으로 조명하여야 한다.
덕천서원은 산천재를 연고지로 삼아 창건되었다. 덕천서원 사당에서 볼 때 산천재는 좌청룡 방향에 있다. 산천재가 있는 좌청룡 방향은 당연히 좌상(左上)이라는 높은 신분자리를 부여받게 된다. 이럴 때 사당 우측 우백호의 공터는 우하(右下)라는 낮은 자리에 해당된다. 우하에 걸맞게 이곳 공터에는 노비들이 기거했던 고직사가 있었다.
현장답사를 다니다 보면 방향과 공간을 무시한 안내판을 간혹 보게 된다. 그런 그림들은 답사가 초행길인 사람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그 중 하나가 이곳 덕산 땅에 걸린 조식유적안내도다. 비밀스러운 무릉도원이나 십승지 지도처럼 헷갈리게 그려져 있다. 이것은 안내지도가 아니라, 추상화 지도쯤 된다.
천왕봉이 본래 위치에서 10여리나 벗어나 영신봉 쪽에 걸려있는 이런 지도라 할지라도, 이곳 덕산사람이나 공무원들은 곧잘 이해한다. 그들에게는 항상 다니던 도로이기에 정상적으로 보이는 마을 주민용 안내도가 된다. 남북방향까지 거꾸로 붙어있는 안내도를 바로 잡아, 남쪽에서 보는 지도로 다시 그린 그림을 이곳 여행시에는 참고하기 바란다.
그림처럼 땅줄기 품안에 들어있는 덕산 땅과 같은 분지를 풍수에서는 장풍국면이라고 한다. 바람을 감춘다는 장풍(藏風)과 물을 얻는다는 득수(得水)를 합친 것이 풍수(風水)다. 그러므로 장풍과 득수를 제대로 갖춘 마을이 명당마을인 것이다. 이때 득수는 산줄기를 타고 흘러오는 생기(生氣)를 멈추게 한다. 생기를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못하게 막아주는 물줄기는 일종의 바리케이드라고 할 수 있다.
물줄기가 멈추게 만들어준 생기라 할지라도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맞으면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강풍을 맞고 떨어진 과수원 낙과처럼 모든 것은 말짱 도루묵이 된다. 그러므로 마을을 감싸주는 바람막이 산줄기들이 필요했다. 이것을 장풍이라 한다. 장풍을 흔히 “바람을 감춘다”고 풀이한다. 무덤풍수들이 아전인수 격으로 풀어 놓은 말이기에 초보자들에게는 항상 헷갈리는 표현이기도 하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외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피해가 당하지 않도록 마을을 감추어준다”가 된다.
이곳 덕산 땅은 장풍국면 안에 들어 있기에 풍수조건은 이미 갖추고 있는 마을이다. 덕산마을의 남명 유적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단연 산천재다.
도선서원에다 비교하면 산천재는 도산서당에 해당한다.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에서도 북극성에 해당한다. 이러한 도산서원의 배치를 확장하면, 그것은 바로 이곳 산천재와 덕천서원의 배치가 된다. 덕천서원의 사당과 강당이 어긋나도록 배치시킨 곡선을 연장시켜보면, 이는 스승의 산천재를 북극성으로 삼아 장풍국면을 이루어주는 건물 배치임이 드러난다.
도산서당은 도산서원의 북극성이다. 산천재도 이곳 덕산 땅 남명문화재의 북극성이다.
[조선시대의 명문사학 서원을 가다] 장영훈 도서출판 담디
초판발행 2005년 7월 7일
덕천서원
남명이 유학 강학도장을 열었던 산천재에서 덕천강을 따라 10여분 걸어가면 남명을 받들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덕천서원에 닿는다. 행정구역은 산청군 시천면 원리 219로 덕산에서 중산리로 가는 도로변의 학교 옆에 넓게 자리하고 있다.
덕천서원은 남명이 타계한 지 4년 만인 선조 9년(1576년)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그 뒤에 무도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웠다. 이 서원은 광해1년(1609년) 임금으로부터 ‘덕천서원(德川書院)’이란 액호를 받았다.
이 서원은 외삼문인 시정문(時精門)과 동재 강당 내삼문 사당(숭덕사) 등으로 세워져 있다. 강당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팔작(八作) 기와지붕으로 누각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숭덕사는 정면 세 칸, 측면 단칸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숭덕사(崇德祠) 중앙에는 남명선생의 위패가, 동편에는 그의 제자인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남명의 제자들 가운데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종도, 곽재우,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전국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7년 동안 선봉으로 싸웠고 최영경, 오건, 김우옹, 김효원, 곽재우 등은 학자로서도 이름이 높다.
정인홍은 산림출신으로 송우암, 허미수와 함께 재상의 반열까지 진출했지만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영남 의병대장’의 직함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문에서 그의 스승 남명과 똑같은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다. 명나라 지원군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명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고 우리나라는 군량이 부족하다. 그러니 의존하는 것은 잠시여야지 오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이지 남이 아니다. 급히 나 자신의 믿을 수 있는 것을 구하여 영구한 길을 도모하라.’
남명이 타계한 지 벌써 4백여 년의 성상이 흘러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남명의 학문은 더 빛을 띠고 있고 덕천서원과 산천재도 아울러 활기를 찾고 있다. 산천재에 ‘남명학연구원’이 생겨난 것도 그 보기의 하나이다.
박대정심(博大精深)한 학문범위
남명학연구원은 지난 86년 8월에 현판을 달았는데 고려대 김충렬(金忠烈) 교수가 원장직을 맡고 있다.
김남명학연구원장은 ‘남명 조식의 학문세계와 실천’이란 글에서 남명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조 유학자들 중에서 ①그 학문의 섭렵폭이 넓고 ②그 공부의 자득처(自得處)가 높으며 ③그 사상의 관주지(貫注地)가 깊고 ④그 천이의 조수도(操守道)가 굳으며 ⑤그 출처의리(出處義理)의 분별이 엄정하여 ⑥교육적 영향력과 실효성이 가장 컸던 도학군자를 들라면 단연코 남명 조식을 으뜸으로 치지 않을 수 없다.’
남명 스스로도 제자 오덕계(吳德溪)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한평생 간직한 장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책 읽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내가 만일 성리(性理)를 논변한다면 어찌 남에게 뒤지겠는가” 하고 자부했을 만큼 남명의 독서량은 일반 성리학자들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박대(博大)했다고 한다.
김연구원장은 또 ‘남명의 학문은 이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박대한 지식과 정심(精深)한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성리학 전공에 들어가는데, 남명은 성리학을 공부함에 있어서도 당시 일반의 학풍처럼 주자학 일변도의 협애한 길로 빠져들지 않고, 주(周), 정(程), 장(張), 주(朱) 등 송오자(宋五子)의 학문을 모두 추구하여 역시 폭넓은 성리학을 구축하였다’고 지적한다.
특히 김원장은 남명이 나약한 선비가 아니라 용기있는 서생이었음을 강조한다.
남명은 스스로 얻은 학문에서 용기를 심었고 항상 자신을 깨어있게 스스로 경계한 수행력으로 용기를 다졌다는 것이다.
남명 조식은 그가 사랑하는 지리산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저 무거운 종을 보오.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어찌하여 두류산과 같아서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만고의 천왕봉이여, 하늘이 울려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오.’
한국사학자 이이화씨는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란 글에서 ‘남명은 지리산과 자신을 대비하여 지리산만큼 자기 마음도 넓고 묵직한 것을 나타냈다’고 했다.’
남명이 나약한 선비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실천을 항시 중요시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김남명학연구원장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말하고 있다.
‘남명은 학문을 실천을 위한 하나의 준비요, 공구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학문을 함에 있어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자신의 담력과 지구력과 인내심을 기르는 수련을 쌓았다.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밤을 새운다든가, 늘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차고 다니며 스스로를 경각시킨 것이라든가, 검을 차고 다닌 일들은 모두 실천당체(實踐當體)인 자신을 용기있고 강건하게 만드는 공부였던 것이다.’
허미수는 남명선생의 신도비문에서 ‘늘 뜻을 드높이고 몸가짐을 깨끗이 하며, 구차스럽게 조정의 요구에 따르지도 않거니와 또한 구차스럽게 정치의 잘못을 묵과하지도 않는다. 자기의 몸값을 가벼이 하여 세상에 쓰임을 구하지 않고 고고한 자세로 홀로 우뚝 선다’ 고 썼다.
그 높은 뜻 오늘에도
덕천서원은 산천재의 일부 문짝이 훼손된 것과 달리 깨끗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매년 이곳에선 문도들이 모여 선생을 추모하고 그의 높은 뜻을 오늘에 잇고자 하고 있다.
현재 선생의 별묘에 서 있는 송우암의 남명 선생 신도비문에서 그를 따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선비들은 구차스러워졌고 세속도 많이 변하여 뜻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선생을 생각케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직도 의(義)를 귀히 여기고, 이(利)를 천히 여기며, 청고(淸高)한 인격을 숭상하고 탐학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선생의 공이 컸기 때문이다. ……그 벽립천인의 기상과 일월쟁광(日月爭光)의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늠연히 외경케 하니 선생이 부식(扶植)한 도의와 그 풍범은 퇴폐한 세상 풍속을 쇄신 진작시키는 경종이 되고 있다. ……완악한 벼슬아치를 청렴케 하고, 나약한 선비들의 기개를 떨쳐 일어나게 함으로써 국가의 명맥을 징구케 하였으니 선생의 이름은 이 겨레, 이 강토와 더불어 영원할 것이다.’ 남명 선생의 위패를 모신 덕천서원은 지리산 천왕봉 아랫동네인 중산리로 가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스치고 지나가게끔 돼 있다.
서둘러 천왕봉을 올라보는 것도 좋겠지만 잠시 발길을 멈추고 이 서원을 찾아 남명선생을 따르며 그의 높은 학문과 정신을 잇고자 하는 후학이나 문도들을 생각해보는 것도 뜻이 있을 것이다. 더불어 남명 조식선생의 다음과 같은 시를 떠올려 보면 한층 더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항상 미덥고 항상 조심스럽게
간사함을 막고 성실함을 지키라
산처럼 우뚝하고 물처럼 깊게
봄처럼 싱싱하게 푸르고 무성하라’
『지리산365일 3권』 최화수 지음 도서출판 다나
1995년 1월 25일 4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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