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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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심정과 남명
세심정과 남명
덕천서원 바로 앞의 신천을 내려다보는 곳에 세심정(洗心亭)이 서 있다. 이 정자와 서원 사이로 덕천~중산리의 포장도로가 닦여 있다.
도로를 따라 많은 차량들이 오고 가지만 덕천서원도 세심정도 각종 차량들이 매연과 소음만 남겨놓은 채 무심히 지나쳐버린다.
세심정 앞을 흐르는 신천은 천왕봉에서 발원한 지리산의 청정한 물을 안고 흐른다. 세심정 바로 아래편이 대원사 쪽에서 흘러온 삼장천과 합류하는 양당수이다.
남명 선생의 높은 학문과 고매한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덕천서원을 세우고 선생의 위패를 모신 후학문도들은 서원 바로 앞에 정자 하나를 따로 세우고 ‘세심정’이라 이름 붙였다. 남명 선생의 덕천서원에 들어서기 앞서 이 정자에서 마음을 씻기 위해 ‘세심정’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유평계곡 상류에는 산사람들이 입산하기에 앞서 몸과 마음을 씻는 세신탕(洗身湯)과 세심탕(洗心湯)이 따로 있다. 약초를 캐서 연명해가던 시절의 산사람들은 세신탕에서 먼저 몸을 식고, 다음에 세심탕에서 마음을 씻어야 호환(虎患)을 면하고 약초를 많이 캘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 또 신흥(新興) 화개천에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잡다한 세속의 얘기를 떨쳐내기 위해 귀를 씻었다는 세(洗耳岩)이 있다.
덕천서원 앞의 이 세심정도 남명 선생을 경배하기에 앞서 의관을 갖춘 후학문도들이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서원과 정자 사이에 중산리행 2차선 포장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이 정자가 아주 서정적이었고 운치도 빼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 좋고 숲 좋은 곳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이 정자는 별다른 방호시설도 없이 아주 황량하고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다. 이 세심정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을 면해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었으나 해방 이후에 손질을 잘못한 곳이 여러 군데 있어 아쉽다는 게 고건축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재는 기둥 사이에 지주목을 세워두고 있는데 주변 환경도 수더분하여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준다. 이곳에서 요즘에도 마음을 씻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자동차가 질주하며 내지르는 소음과 매연에 마음뿐만 아니라 옷이 더러워질까 걱정될 정도이다.
이 세심정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남명선생이 후세로 내려오면서 점차 부당한 평가를 받아 소외와 오해 속에 빛을 잃게 되었던 것을 저절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퇴계(退溪)와 어깨 겨루어
남명은 정당한 평가 대신 여러 가지 이유로 폄억되었다.
남명은 무오사화로 영남의 사림파(士林派)가 쑥대밭이 되었던 1501년 퇴계 이황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침체에 빠진 성리학을 바로 세운 석학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를 성취하는데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퇴계가 벼슬길에 나아가 경륜을 쌓으며 성리학의 이론체계를 확립시킨데 비해 남명은 은둔생활을 하며 지행일치(知行一致)의 행동유학을 가르친 것이다.
남명학연구원장 김충렬 교수는 “이조유학(李朝儒學)이라는 거대한 건물은 이론 유학의 퇴계학(退溪學)과 정치교육의 율곡학(栗谷學), 실학 계열의 다산학(茶山學), 정신학의 남명학(南冥學)이라는 네 기둥으로 받쳐져 있다”고 지적하고 이 가운데 남명의 정신유학이 조선의 선비정신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명은 그의 학문과 정신이 후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토록 위대했던 남명이 왜 후세로 오면서 점점 그 빛을 잃고, 지금은 그의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드물고 혹 있다손치더라도 부당한 평가를 받는 소외와 오해 속의 인물이 되었던가. 세상에는 역사적 후광을 받고 위대하지 못하면서도 위대하게 추앙되기도 하고 역사의 뒷전에 가리워져서 위대했으면서도 유성처럼 꺼져가는 이가 있다. 이를 역사의 교활한 조작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남명은 가리워져 있을 뿐 꺼져버린 불은 아니다. 즉 언제라도 다시 만길의 기염을 뿜어낼 활화산인 것이다.’ 이렇게 지적한 김교수는 남명이 현재의 의식 속에서 가리워져 있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불행한 요인들’이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정으로부터의 경원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집권자는 자기를 비판하고 항거한 사람을 드높여준 일이 없다.
둘째, 남명의 고제(高弟)인 정내암의 실각이다. 정내암은 영상의 자리에 올라 스승을 영의정에 증하고 묘도와 문집 간행 등으로 남명의 이름을 빛냈다. 정내암이 영상에 있을 때인 광해군 원년에 덕천서원이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그가 실각하자 모든 것이 뒤집혔고 대원군 때 사액서원도 철폐되었다.
셋째는 남명의 문집이 훼판된 것이 많고 후손들에 의해 수정되기도 하여 진면목을 상실한 것이다.
넷째는 신도비 시비로 인한 유림과의 갈등과 퇴계 계열과도 사이가 좋지 않아 점차 빛을 잃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당색을 초월하고 지역과 학파를 초월해서 추앙받아야 할 남명은 그 문도들과 자손들의 쓸데없는 분쟁에 휘말리어 덕산 입덕문 안에서 날로 위축되어 가야만 했다. 오늘날 남명을 아는 이가 드물고 그를 오해하는 이유가 모두 이러한 남명외적인 데 있음을 알 때 남명학과 사상 그리고 정신은 꼭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김교수의 안타까운 지적이다.
정화사업 서둘러야
남명 선생은 이곳 덕산 외에 그의 고향인 합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합천이 고향인 한 시민은 기자에게 “3・1운동이 한강 이남에선 합천에서 가장 큰 규모(2만 명)로 며칠째 계속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남명을 추앙하고 학문과 덕행을 계승하기 위해 그를 모시는 서원은 덕산 외에도 고향인 합천 삼가(회산서원이 자리를 옮겨 용암서원이 되었다)와 처가가 있었던 김해(신산서원)에도 있다.
그 가운데 지리산 덕산의 덕천서원을 비롯한 남명 유적은 지리산 정신과 함께 앞으로 지리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된다.
남명정신이 지성인에게 주는 교훈은 진리와 도의 편에 서는 지성, 자아세계가 확립된 지성, 역사문화의 주체적 지성, 고고탁절한 기상 등으로 일컬어진다.
‘현대 지성들의 무견(無見) 무능(無能) 무력(無力)을 추방하고 강의엄준한 ’선비정신‘을 되살리려면 우선 역사상의 교훈과 전형으로 남명의 기상과 정신을 거울삼지 않으면 안 되겠다’(金忠烈 ‘南冥曺植의 학문세계와 실천’)
덕산의 남명 유적들은 사적 105호로 지정되어 앞으로 크게 정화될 것이라고 한다. 실제 덕산의 남명 유적들은 직접 둘러보면 그의 높은 학문과 정신 그리고 후학에 끼친 공로에 비해 너무 쓸쓸한 모습이다. 그것을 세심정의 황량한 모양이 웅변해준다.
덕산의 한 양식있는 주민은 “산천재 앞에 크게 세워둔 조식 선생 유적안내판에 ‘조식 유적’이라고 써놓은 것부터 ‘남명 조식 선생 유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명의 진면목을 오늘에 제대로 살리는 것은 그의 영광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모두에게 올바른 정신세계를 확립하게 해주므로 더 값질 것이다.
『지리산365일 3권』 최화수 지음 도서출판 다나
1995년 1월 25일 4쇄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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