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잎갈나무

[숲에는 잎들이 떨어진 자리에 혹처럼 불거져 나온 흔적을 만드는 일본이깔나무들이 시원스레 서 있어 겨울 정취를 더해 주고 있다. 유명산, 중미산 잎대는 특히 일본이깔나무 조림지로 유명한데 이들이 겨울 풍경을 만들어내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다. 나무 줄기에는 지속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듯 누런 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 한 아름이나 되는 기둥을 가진 높이 20미터 이상의 일본이깔나무는 기존의 편견을 없애준다. 직접 다가가 양팔로 껴안아 본다. 기둥의 아랫부분이 붉기조차 하다.
일본이깔나무는 겨울에 낙엽이 지는 낙엽성 침엽수이다. 이와 비슷한 나무로는 우리나라의 이깔나무가 있는데 언뜻 봐서는 구별하기 힘들다. 이깔나무는 한자로 낙엽송落葉松이라 불리는데, 소나무와 같이 비늘잎이면서 낙엽이 진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그래서 우리말도 잎갈나무라고 했던 것이 현재는 발음대로 나무명이 결정되었다. 이깔나무는 남한 땅에서는 잘 볼 수 없다. 추운 지역을 좋아하는 성질 때문에 한반도에서는 주로 함경도 지방에서 자라고 있고 백두산과 개마고원의 이깔나무 숲은 이지적인 한대림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다.
이깔나무는 한 그루로는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온 산록이 이깔나무로 채워져, 따스한 봄날 온 산이 연한 연두빛으로 아스라이 돋아오면 숲은 더 없이 아름답다. 녹음 짙은 여름, 원추형으로 높이 솟아 정형의 가지를 아래로 내리뻗어 내뿜는 초록의 향연은 도도할 정도이다. 결코 줄기가 굽는 일이 없고 위로 쭉쭉 뻗는 성질은 이지적인 느낌을 더한다. 가지런하고 멋지게 뻗어내린 가지들은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짧아져 완벽한 삼각형의 구도를 이룬다. 가을이면 이깔나무는 군무로 아름다운 단풍숲을 만들어 낸다. 붉고 노란 단풍의 감각적 색감은 사색과 명상으로 이끄는 중후함이 없다. 붉은 당단풍의 바다는 잔혹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늦가을이 되도록 아무런 변화의 내색도 없이 서있다 어느날 갑자기 전체가 노랗게 물들어버리는 이깔나무의 단풍 군무는 품위가 있다. 전체적인 수형과 무리지어 서 있는 평화가, 그리고 아름다운 노란 색조가 가을 숲을 현란하지 않으나 기품있는 숲으로 만든다.
그러다 문득, 늦은 가을 찬비에 폭삭 주저앉는 습성은 얼마나 가슴을 저미는 광경을 연출하는가. 한 해의 성장이 고스란히 땅 위로 주저앉아 깃털처럼 부드러운 융단을 만들면, 겨울이 멀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낙엽송 숲의 그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땅에 들어서면 더할 수 없는 고요와 평화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이깔나무는 숲의 발달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천이선구 수종으로 열렬한 빛의 신자이다. 모든 것을 다 열어 햇빛이 왕성한 숲에서 낙엽송은 쑥쑥 자란다. 빛에 대한 추종은 몸통 살찌우기도 잊은 채 하늘을 향해 올라가게 한다. 가끔 가지가 잘리거나 옆의 나무가 쓰러져 아래로 빛이 스며들면 줄기의 그루터기에서 여우꼬리 같은 움이 돋아나 덕지덕지 낀다.
일본 이깔나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림 수종이었다. 1970년대 이후 산림녹화사업을 실시하면서 일본이깔나무를 대대적으로 심었다. 그러나 빽빽이 심어진 일본이깔나무들은 협소한 공간에서 말라깽이 같은 모습으로 자라 우리에게 별로 좋지 못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후대를 보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다른 나무들에 의해 점차 고립되고 밀려나가고 있어 일본이깔나무 숲은 종종 지저분한 느낌이다. 특히 가늘고 길게 자란 데다 뿌리가 얕아 바람이 불면 쓰러지는 나무가 많아 사람들에게 더욱 가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일본이깔나무가 없었더라면 다양한 나무들로 멋진 숲이 이루어졌을 거라는 일종의 원망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일본이깔나무가 조림될 당시, 산림의 지반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가뭄이나 홍수에 취약했던 숲 사정을 생각해 본다면, 그나마 일본이깔나무로 숲이 유지될 수 있덨던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 너무 흔하게 심어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의 눈빛을 감내해야 하는 일본이깔나무, 열매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고, 목재가 훌륭한 자원이 되는 것도 아닌 나무, 여기에 와서 이렇듯 훌륭히 관리되고 있는 일본이깔나무를 보니 너무 고맙고 반갑다.]

[차윤정의 우리숲 산책] 149-152쪽
차윤정 지음
웅진닷컴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