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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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습지
비밀의 습지
여기 비밀스런 습지도 장마에 들었다. 늦은 오후, 이슬비가 내리는데 나는 감추어 둔 완사습지1에서 한밤을 지새우기로 했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버들숲 너머로 뽀얀 안개가 산자락을 걸고 앉으니. 이것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 아닌가!
땅거미가 떨어지는 습지를 홀로 바라보며 섰다. 무성한 버들숲 강물 위로 깨알같은 빗방울이 쏟고, 습지는 불어난 물줄기에 퉁퉁 부어 있다.
뭇 새들은 아랑곳없이 저마다의 생명을 노래하는데. 저만치 버들숲 가지에 왜가리 한 쌍이 숨죽이고 앉았다. 오늘 밤은 저렇게 지새울 모양이구나! 야생은 삶을 모질게 하나니, 살아남는 것이 생존의 힘인가? 야생과 문명 관점에 따라 삶의 자세는 바뀐다.
버들숲 위론 제비들이 놀라운 곡예비행을 한다. 강남 갔던 제비! 희망의 아이콘이었던 이 날렵한 새는, 대대손손 날개와 몸통의 형태며 깃털 조직의 섬세한 변화를 얼마나 조율하고 다듬었을까? 새의 깃털 한 조각도 공기역학이란 강연을 하느니. 제비의 예술적 창조 행위 속에는 자연과학이 숨어있구나!
어둠이 사위를 덮고, 나는 텐트로 돌아와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뜨거운 차를 끓인다. 홀로 갇힌 공간. 시각이 사라진 자리엔 청각이 되살아나 온갖 생명의 소리를 경청하게 한다.
한밤중 빠른 발걸음으로 텐트 곁을 지나가는 동물의 발자국 소리에 덜컥 잠이 깬다. 겁이 많은 내가 이렇게 야생 체험을 하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다.
이른 새벽 작고 가벼운 새들이 또랑또랑 알람을 울린다. 호수에서는 꽥꽥거리는 물새, 산에서는 쏙독새, 뻐꾸기, 저 멀리 마을에서는 닭이 회 치는 소리를 듣는다. 아침을 깨우는 소리에 나는 텐트를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본다. 밖에는 여전히 이슬비가 내리고, 자욱한 안개 속에 동이 트고 있다. 돌고 돌아 아침은 어김없이 밝아오나니!
다섯 시쯤 습지를 잇는 둘레길을 걷는다. 어제 그 자리, 미묘하게 달라진 습지를 내려다본다. 저 속에는 얼마나 많은 생명 이야기가 꿈틀대고 있을까? 아직은 비밀의 완사습지!
⎯야생의 여행자⎯
*1 완사습지
사천시 곤명면에 있는 완사습지는 160만㎡ 선버들 군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9년 진양호 남강댐 건설로 수몰되기 전 이 지역은 주로 논과 밭이었다. 인간의 간섭을 벗어난 농경지는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 이차림으로 형성된 완사습지의 놀라운 생태환경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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