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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소나무를 선호한 이유
작성자 : 관리자(admin)   0         2021-05-01 08:52:13     108

 

고려와 조선 왕조가 이 땅의 수많은 소나무 중에 유독 안면도 소나무를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국립산림과학원 배재수 박사는 수운(水運)의 편리함벌채하기 좋은 지세소나무 생육에 좋은 환경을 꼽는다.

하나의 무게가 1톤이 넘는 대부등 같은 무거운 물자를 수송하는 데는 육로보다는 강이나 바닷길이 훨씬 편했다안면도에서 최대 목재 수요처인 개경이나 한양은 물길로 가면 아주 가깝다또 섬 전체가 구릉지라 나무를 베고 운반하기가 용이하며물길을 이용하면 벌채한 목재를 즉시 운반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게다가 무엇보다도 질 좋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그래서 우리 조상은 안면도를 국용재(國用材소나무의 주요 생산기지로 활용했던 것이다.

안면도 소나무는 강원도 영동지방 소나무처럼 곧고 쭉쭉 뻗었다그에 비해 천수만 건너 홍성 지방 소나무는 대체로 굽고 왜소하다지리적으로 가까운데도 왜 이렇게 다를까?

조선 왕조는 산림을 결딴낸 고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개국과 더불어 강력한 산림 보호 정책을 실시한다또 국용재인 소나무를 원활하게 충당하고자 무분별한 소나무 벌채를 엄격히 금지한 소나무 벌채 금지(松木禁伐줄여서 松禁정책도 폈다.

조선 초기에 소나무 보호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왕은 세종이었다세종은 원년(1419)에 연해(沿海한광처(閑曠處)에 소나무를 심으라고 명하였고, 6(1424)에는 [송목양선병선수호조건松木養成兵船守護條件] 7개조를 반포하여 선박 건조에 필요한 소나무의 보호와 육성을 위한 구체적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이 규정에는 방목장이 아닌 곳에서는 소무를 지키기 위해 함부로 불을 내지 못하게 했으며바닷가 각 고을에서 몇 그루나 심고 어떻게 가꾸는지를 해마다 보고하게 했다그리고 이러한 규정을 따르지 않을 때는 만호천호수령감사 등이 법률에 따라 논죄한다고 밝혔다.

400년 이상 지속된 조선 왕조의 송금정책은 세종 23(1441)에 시행된 송목금벌지법松木禁伐之法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세종은 소나무를 함부로 벨 수 없게 이 법을 시행하는 한편 30(1448)에는 소나무가 잘 자라는 연해 지방의 도서와 곶 300여 곳을 의송지(宜松地)로 정하여 인근 수령과 만호에게 배양.관리하라고 명하였다의송지는 모두 300여 곳이었다함길도에 23평안도에 28황해도에 22경기도에 26강원도에 6충청도에 25전라도에 93경상도에 76곳 등으로 대부분 해안가나 섬이었다해안가나 섬을 선정한 이유는 조선재궁궐재의 공급제철제련도자기사기지그릇의 제조나 소금가마에 필요한 연료용 목재 조달을 위한 해상 수송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세종이 안면곶을 의송지로 지정하고 수군이 직접 관리하도록 하였던 송금 정책은 1485년 세조가 펴낸 [경국대전]에도 반영되어, [경국대전식재(植栽)조에는 안면곶과 변산반도는 해운판관이해도(海島)는 만호(萬戶)가 자세히 살피고”, “해마다 봄에 어린 소나무혹은 종자를 심어서 기르고연말에 심은 숫자를 왕에게 보고한다어긴 자는 산지기는 장 80, 당해 관원은 장 60에 처한다.”고 명기되어 있다.

안면도의 소나무가 우량한 형질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지난 수백 년 동안 꾸준히 가꾸고 지켜 온 정성 때문이다그런 정성이 없었던 인근 서해안 솔숲은 차츰 훼손되어 불량해질 수밖에 없었다.

안면도 소나무가 이웃 충청도 지역에서 자라는 소나무보다 뛰어났음을 증명하는 내용은 또 있다숙종 대에 이르러 조선 왕조는 전국에 282곳의 봉산(封山)을 지정했다그 중 충청도의 봉산 73곳은 모두 안면도에 표시되었음을 동여도로 알 수 있다섬 하나에 전국 봉산의 4분의 1을 두었다는 사실은 국용재 생산기지로 안면도를 중시했던 조선 왕조의 의지와 양질의 소나무를 생산하고자 철저하게 관리하고 보호한 정책을 엿보게 한다.

최근 고려대학교 자연환경보존연구소와 한국수목보호연구회가 밝힌 안면도 소나무의 생육 특징은 흥미롭다안면도 소나무는 일정 시점에 이르면 수고생장(높이생장)은 더뎌지는 반면상층부가 굵어져 전체적으로 수간이 고루 발달한다고 한다따라서 수고생장은 영동이나 영서지방 소나무에 미치지 못하지만수간이 고루 발달하는 (부피생장)특성은 안면도 소나무가 고려와 조선 왕조에 걸쳐 궁궐재와 조선재로 명성을 얻게 된 연유라고 할 수 있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이 땅 최상의 국용재 생산 기지란 명예를 누리던 안면도의 솔숲은 조선의 몰락과 함께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일제는 안면도 솔숲을 일본인에게 불하하여 조선 제일의 국용재 생산 기지를 결딴내는 데 일조하였다더 안타까운 사실은 광복 이후에도 안면도 솔숲에 대한 훼손 행위가 계속 됐다는 것이다.

자유당 시절 정상배들이 저지른 약탈식 벌채목야지 조성을 위한 대부(貸付)등은 지난 천년 동안 안면도 소나무 숲을 왜 국가가 관리했는지를 간과한 정부의 근시안적 산림 시책이었다특히 1965년에 안면도 전체 면적의 27%에 달하는 3.200ha의 소나무 숲 소유권이 국가에서 지방정부로 이관되어 훼손을 부추긴 점은 안면도 소나무 숲의 역사적 의미를 간과한졸렬한 산림 정책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1988년 정부가 115ha에 달하는 안면도 솔숲을 유전자 보전림으로 지정하여 보호키로 한 것이다그리고 승언리와 정당리 일대 130만 평에 자라는 솔숲이 임업 선진국의 숲 못지않게 ha당 최고 360m³의 축적을 간직한 채 울창하게 자라는 현실도 고무적이다이 땅에서 ha당 300m³ 내외의 축적을 가진 숲을 찾기가 쉽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안면도 솔숲의 진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족 하나, ‘일본 도쿄대학의 상징인 아카몽(迹門)이 안면도 소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태안군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 전영우 /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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