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여행
큰나무 여행 공간입니다.
운무를 빗질하는
운무를 빗질하는
숲길에 들면서 파릇한 밤토리와 눈길이 마주쳤다. 가을이 오고 있다. 어두워지는 밤길을 걸어 도암재1에 도착하니 8시쯤이다. 솔숲 사이로 차오르는 달빛이 눈높이에 있다. 먼 산에 소쩍새 소리, 올 5월부터 지금까지 듣고 있다.
땀을 식히고 랜턴을 밝혀 쉼터 데크 위에다 텐트를 친다. 야생에 나와서도 버릴 수 없는 하룻밤의 심리적 편안함. 어쩌면 우리는 문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숲으로 둘러싸인 텅 빈 공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풀숲에는 늦반딧불이 한 마리 유유히 솔숲으로 날아오른다. 이 얼마나 반가운 사건이냐! 꽁무니에 불을 켠 채 사랑을 찾아 밤하늘을 나는 수컷 반딧불이. 밝고 화려한 빛을 낼수록 풀숲에서 바라만 보는 암컷에게 선택당할 수 있다니, 그리고 천적을 혼쭐내는 경고 신호도 된다니. 생명 가진 것은 건강할 의무가 있더라.
생존과 생식의 방법이 이렇게 낭만적인 곤충이 또 있을런지 나는 모르겠다. 사랑 찾아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된 반딧불이! 여기 넉넉하고 사랑스러운 대자연의 가을밤을 홀로 맛본다.
어슬렁어슬렁 한참 동안 풀밭을 거닐다가 텐트에 누웠다. 밤 12시 지나 잠에서 깨어, 솔가지 사이로 휘영청 솟아오른 달을 본다. 보름을 하루 앞둔 만삭의 달님이시다. 동심원을 그리는 달빛은 인력이 크나니. 가슴 시린 서러움도 간절한 바람도 고개 들어 두 손 모으게 했구나!
6시쯤 밖이 훤해졌다. 숲에선 부지런한 늦털매미 소리가 들려오는데, 나뭇잎 하늘 사이론 소리없는 새들이 날고, 그 아래 사나운 어치들이 큰소리로 다툰다. 곧장 새섬봉을 향해 가파른 숲길 오르니, 아침 발걸음이 벅차다. 자동으로 체력 검사를 받는구나!
저기 산봉우리에 운무가 걷히며 어김없는 해님이 떠올라, 서둘러 신선대 같은 바위 벼랑에 올랐다. 머리 위로 새섬봉 깎아지른 봉우리가 내려다보고, 아래론 소쿠리 같은 와룡마을이 가만히 올려다본다.
길게 늘어선 동쪽 산자락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운무를 빗질하고 있다. 그 사이로 황금 빛살이 신비롭게 스며들고. 골짜기 아래서 피어오른 안개구름이 빠르게 몰려오고 몰려가더니 어느새 새섬봉 봉우리로 솟구친다. 기암절벽을 부드럽게 타고 넘는 운무! 나는 황홀한 풍정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다.
신선 같은 기암 위로 신선 같은 바람이 분다. 한바탕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그 위로 하루의 해님이 얼굴을 내민다.
타는 듯한 가뭄을 견뎌낸 신갈숲 도토리도 익어가는데, 깃털처럼 뛰쳐나온 곤줄박이 한 쌍! 코앞 바위에 포르르 앉더니 이내 자리를 뜬다. 반가운 인사처럼 어쩜 차림새가 저리도 예쁠까?
내려오는 숲길 가 아랫목에 큰도둑놈의갈고리꽃이 머쓱하게 피어났다. 이제 곧 도둑놈의 열매가 도둑놈을 따라나설 거다. 늦털매미 소리는 왁자지껄 더욱 풍성해지니, 아~ 가을이로구나!
⎯야생의 여행자⎯
*1 도암재
도암재는 경남 사천시 새섬바위길 390-82 등룡사 1km 위에 있다. 가파른 기암절벽 새섬봉 오르는 길목 쉼터다. 와룡산 민재봉(799m)은 오랫동안 주봉이었지만, 2009년 해발고도 측정 결과 새섬봉(801.4m)이 더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와룡이 휘몰아치는 주 능선 아래 오목한 골짜기엔 와룡마을이 포근하게 들어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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