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일기
치유공감 관찰일기 공간 입니다.
잣나무와 청설모
잣나무와 청설모
잣나무 숲속교실을 지나다가 작~작~ 소리가 들려서 귀를 기울여보니 청설모 한 마리가 바닥에서 잣송이를 까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바쁘게 비늘껍질을 벗기고 있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금방 달아나야 할 것처럼 무척 바쁘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틈새를 이용해 재빨리 잣송이를 따서 껍질까지 까야만 자기 몫이 된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다. 양쪽 앞발로 잣 양쪽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송진이 덕지덕지 붙은 비늘껍질을 이빨로 잘도 까낸다. 청설모는 앞발과 입에 송진을 묻히지 않는다. 그야말로 선수다. 꼭지까지 벗겨내는데 얼마나 빠른지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것 같다. 아마 잣비늘 껍질을 벗기는 것은 땅바닥이 아니면 어려운가보다. 순식간에 비늘껍질 안쪽에 송알송알 들어박힌 잣들이 탐스럽게 드러났다.
이제 송진이 묻을 걱정이 없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잣송이를 베어물더니 재빠르게 잣나무를 타고 오른다. 낮은 가지에서 유유히 식사를 즐기지 못하고 또 위로 오르는 것을 보니 불안한가보다. 나무 아래 가까이 다가서 그 모습을 지켜보려고 했다. 잣나무에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다. 안전한 거리 확보가 됐다 싶었든지, 뒷발로는 나뭇가지를 지탱하고 앞발로는 잣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고 이빨로 잣을 빼내서 까먹기 시작한다.
청설모와 다람쥐는 잣송이에서 잣을 빼먹으면서도 알맹이가 들지 않은 잣은 어떻게 아는지 어김없이 빼놓는다. 금방 먹고 간 뒷자리에 남은 잣을 깨물어보면 어김없이 빈 껍질이다. 만져보지도 않고서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무엇일까? 평생을 아니, 대를 이어 잣을 다루어 왔으니, 그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일념으로 뚫어보면 그 대상을 알 수 있는 이치인 것 같다.
맛있는 잣을 빼먹고서 껍질은 아무 미련없이 그대로 놓아버린다. 그 껍질을 주워보았더니,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져 있다. 어찌 저리도 정교하게 그 단단한 껍질을 깔 수 있을까?맛있는 잣을 빨리 먹고도 싶지만 불청객이 자꾸만 지켜보고 있으니 안되겠다 싶었든지, 나뭇가지를 타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멀찍이 이동을 한다. 잣송이를 단단히 물고는 가는 가지 끝을 타고 잘도 건너간다. 청설모는 참 날래고 몸이 가벼운 것 같다. 잣을 따 먹으려다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시달렸으면 저렇게 멀리 도망을 갈까 싶다.
이곳 잣나무 숲이 인간의 활동영역이다 보니 가을이면 청설모들과 서로 먹이를 다툰다. 말하자면 잣은 맛이 좋고 영양가가 많아서 사람과 청설모, 다람쥐가 서로 먹이다툼을 하는 것이다. 청설모는 잣나무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며 순식간에 잣을 딴다. 누구나 흉내낼 수 없는 남다른 재주를 지녔다. 우리는 청설모가 떨어뜨린 잣송이를 바라보면 기분 좋게 가로챈다. 그들 노동의 대가를 그냥 빼앗아버리는 꼴이다.
청설모가 딴 잣송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한가로운 9월 중순 숲속교실을 ‘텅~’ 하고 내리친다. 그 잣송이를 엉겁결에 주워들고 있는 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청설모의 화난 눈망울이 어른거린다. 잣을 빼앗긴 청설모는 잣나무 꼭대기에서 서둘러 내려온다. ‘내 것 내놔라!’는 투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시위를 한다. 고개를 번쩍 쳐들고 앞발을 세우기도 한다. 자신의 화난 감정을 최대한 드러내 보인다. 심하게 화가 나면 찍찍거리며 날뛰기도 한다고 한다. 나약한 자가 취할 수 있는 무력한 방법이다.
유사 이래 끊임없이 이어져 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나의 곁에도 머물고 있구나!
2009년 9월 14일 유명산자연휴양림에서 쓴 글을 2021년 7월 11일 홈피에 올리며 수정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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