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나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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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능선의 새벽
지리 능선의 새벽
지리산 자락, 쏙독새 우는 밤은 적막하기만 할까? 그 적막 속에는 존재를 잇는 사랑이 있고, 고단한 야생의 휴식이 있고, 낯선 그리움도 있을 거야.
하루 또 하루 지나서 한참을 벼르다가 일탈의 용기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만큼 낯선 시작은 어려운 것 같다. 추위가 물러난 5월 어느 날 불현듯 하룻밤을 지낼 장비와 물품을 챙겼다. 잠시 집을 떠나는데 이렇게 많은 것이 필요할 줄이야. 사바나 인류인 우리는 야생을 벗어나 참 멀리까지 왔구나! 거대한 문명의 소맷자락을 붙잡으며 나는 LED 랜턴을 배낭 가장자리에 넣는다.
저녁때 지리산 천왕봉 능선이 유장하게 두 팔 벌린 숲길 조망 포인트에 올랐다. 흐렸던 하늘이 노을로 물드는가 싶더니 용머리 구름 위로 영롱한 햇살이 부풀어 나온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지리 능선의 저녁노을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부드럽게 산그림자를 그리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능선들이 아련하게 드러눕는데. 심연의 맥박이 모세혈관처럼 번져 나와 손가락 마디마다 펄떡거린다.
대자연의 경관이 맥박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이젠 첩첩산중 어스럼 산새들의 합창이 시작된다. 지휘자도 없는 고유한 프랙털 속성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그러면서 또 우리다. 다시 검은등뻐꾸기 한 마리 줄기차게 존재의 의미를 찾으니, 그 틈바구니로 어둠이 쌓인다.
간단한 저녁을 먹고 1인용 텐트에 홀로 갇혀 앉으니, 기분이 오묘하다. 해방감과 속박감이 동시에 든다. 아마도 이건 어제의 나(사바나 인류)와 오늘의 내(현생 인류)가 혼동의 장에서 충돌하는 것일 테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소리는 잦아들고, 뒤바뀐 장을 여는 쏙독새 소리가 밤공기를 가른다. 쏙쏙쏙쏙 쏙쏙쏙쏙쏙~ 야행성인 이 새는 밤에 활동하며 짝을 찾는다. 그 간절한 마음을 어쩌겠니? 밤을 새워 우는 쏙독새 소리를 따라 낯선 밤은 깊어 가고, 나는 하룻밤 고독한 야생의 여행자가 된다.
새벽의 날카로운 고라니 함성에 잠을 깼다. 이들은 또 거친 함성으로 짝을 찾는가 보다. 이내 맑고 부지런한 새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니. 놀랍게도 이곳 새들의 아침은 네 시쯤이다. 나는 체온으로 데워진 침낭에 누워 경이로운 야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다섯 시쯤 빼꼼~ 텐트를 열고 나왔더니, 해를 품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지리 능선이 다시 어둠을 뚫고 돌아오고 있다. 거대한 장막으로 늘어선 산맥은 준엄한 호위 무사가 되고. 철옹성 너머로 지리 능선을 감싸는 아우라!
밤을 새워 생명을 잉태한 사랑의 불씨가 차가운 이성에 불을 밝힌다.
⎯야생의 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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